거인 / 김태용
이 영화에는 제대로된 집도 어른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의미로써의 집이란 ‘가정을 이루고 생활하는 집안’이다. 또한 어른이란,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인’이라는 영화 제목은 이중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육체적인 거인이고, 다른 하나는 상징적인 거인이다.
보육원의 어린 아이들 속에 영재는 거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곳의 아이들과 다름없이 영재 역시 보호 받아야 할 아이다. 마음이 다 자라지 않았기에 거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버겁다. 하지만 거인에게 집은 너무 작고, 올려다 봐야할 어른도 없다. 보호해줄 수 있는 곳도, 가르치고 보살펴줄 존재도 없는 것이다. 영재는 거인인 채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영어로 영화의 제목은 ‘Set me free’이다. 나를 놔줘, 자유롭게 해줘, 해방시켜줘, 쯤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영재에게는 그럴 힘이 없다. 몸은 거인일지언정 거인이 가질만한 힘은 가지고 있지 않다. 상징적으로 거인이란 이 모든 상황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맞는 집이 없으니 집다운 집을 짓고, 어른이 없으니 어른이 되는 힘을 가진 거인 말이다. 그러나 힘은 어디가고 껍데기만 덜컥 뒤집어썼다.
어쩌면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이 거인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거인이 된 자신을 발견하고 거인으로서 행동하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자신이라 믿어버린 거인들. 그래서 ‘어른’이 되지 못한 거인들 말이다. 영화에 성당이 등장하는 것은 단지 이중성을 말하기 위한 소재만은 아니다. 그들이 어른이 될 수 없고 현실에 진정으로 기댈 어른이 없기에, ‘자기 일에 책임을 지는’ 성인을 바라는 것이다. 조물주가 스스로 만든 창조물에 책임을 지는 신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영재가 보육원의 원장 부부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처럼, 원장 부부가 보육원을 운영하는 일은 비슷한 지점이 있다. 원장 부부는 믿음과 선행이 동시에 실천되어야 구원받는 천주교를 믿는다. 보육원은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말이다. 원장의 아내가 ‘은혜도 모르는 새끼’라고 뇌까리는 것은 그녀가 믿는 신 역시 내뱉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는 제대로 된 어른이 없다는 철저한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윤미와 윤미의 어머니가 한 순간 반짝이기는 한다. 윤미의 어머니는 집다운 집을 경험시켜주고, 윤미는 자해와 위협을 한 영재를 잠시나마 다독여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반짝임, 영재를 구원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국 영재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재에게 구원이란 단어는 사치에 가까워 보인다. 생존이라는 단어가 영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요한이 되든 영재가 되든 무엇이든 된다. 그런 영재에게 10대는, 일탈은, 반항은 무의미하다. '세상'이라는 불특정 다수를 원망하거나 증오하기 전에 일단 살기위해 몸을 굽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어른이라는 사전적 정의에서 가장 강력한 단어는 ‘책임’이다. 거인에서 괴물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인데, 거인이 가진 일말의 책임감조차 거인에게서 앗아가 버리면 괴물이 된다. 책임은 인간에게만 있는 개념이다. 인간 스스로 정의를 내린 개념이고 사회에 속해있고 학습을 했기에 아는 개념이다. 책임은 자신과 관련된 일에 대해 의무나 부담을 지는 일이다. 그리고 어른은 그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영화 속의 어른들 중 책임을 모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짊어지지 않을 뿐이다. 이는 학교 선생과 원장의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너처럼 상처 받은 애', '너처럼 불상한 새끼'는 널려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는 영재의 고유성을 부정하는 말이자 자신의 책임을 덜기위한 합리화이기도 하다. '영재 같은 애가 한 둘이야? 어떻게 일일이 다 신경을 쓸 수 있겠어? 어쩔수 없는 일이잖아. 그리고 저런 새끼들이 꼭...'이라는 서브텍스트가 대사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한 짓을 모르나이다'라고 말했으나 여기서 어른들은 '알지만 어쩔 수 없지 뭐, 하던대로 하자.'라는 식이다. 이는 어느 독일 이론가의 말과도 비슷하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
이런식의 냉소와 무책임이 극에 달했을 때, 냉소하지 말아야 할 것에도 냉소하고 무책임 하지 말아야 할 것에도 무책임할 때 괴물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에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괴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불편한 이유는 아는 것과 하는 것의 괴리 때문일 것이다. 성당의 미사와 앞서 말한 냉소가 지속적으로 장면을 통해 교차된다. 구체적인 상황이 다를 뿐, 현실에서 꽤 자주 겪을 법한 장면들이다. 나 하나 건사하기 벅차서 누군가에게 매몰찼던 적, 내 이득을 위해 누군가에게 굽실거린 적, 누군가의 곤경에 대해 눈을 감은적, 어쩔수 없었지만 정말 어쩔수 없었는지 의문이 들었던 일들. 안다. 하지만 아는대로 하거나 안다고 해서 멈춘적이 많지 않다. 무시무시한 괴물은 아니라도 평범한 괴물쯤은 되는 모습들이다.
절망을 먹고 자라나 절망을 양산하는 그런 작은 괴물들. 누구에게나 그런 면이 있다 생각한다. 태어나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살아가는 환경도 선택지가 없다. 시간에 저항할 수 없기에 몸은 자라고 생존의 기본 요건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이 가운데 생존을 위한 선택조차 '나'가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던 세상의 규칙 속에서 해야한다. 누군가는 운이 좋아 조금 나은 환경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 속에서 대개는 거인의 면모를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미 거인이 되었고 괴물이 될 수도 있는 자신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스스로가 거인임을, 언제든 괴물이 될 수도 있음을 자각한다면, 덜할 수는 있지 않을까. 가능한 거인임에 익숙해지는 것을, 괴물이 되는 것을, 미룰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절망을 먹고 자란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청춘, 성장, 10대의 수식어가 붙는 작품으로써 '자란다'는 동사는 어울린다. 무엇보다 10대가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내게 이 영화는 청춘을 기점으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 거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보였다.자라지 못한 거인들이 끝내 또 다른 거인을 만들어내는 순환적인 구조처럼 느껴졌다. 영재는 이미 거인이다. 계속 거인으로 살아갈까, 괴물이 될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