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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포템킨 / 에이젠슈타인뭔가 리뷰 2018. 11. 7. 01:36
1900년대 초, 소비에트 인구의 절반 이상은 문맹이었다. 소비에트 권력은 러시아 전역에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기 위해 영화를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꼽았다. 때문에 정부는 영화산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1920년대 소비에트 영화는 황금기를 맞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중심에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있었다. 그는 27세에 ‘1905혁명’의 20주년 기념영화 감독으로 선임된다.
에이젠슈타인은 영화에 담기로 예정되어 있던 러일전쟁을 비롯한 다른 사건들을 과감히 잘라내고 ‘전함 포템킨 반란’에 집중한다. 이는 1905년 6월 27일, 오데사 항에 주로 입항해 온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포템킨호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혁명의 기운이 러시아 전역에 몰아치고 있었는데, 주된 이유는 러일전쟁 때문이었다. 이미 국왕의 독재와 빈부격차, 현대적인 복지제도 부재로 국민들은 제 권리를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에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마저 패하게 되자 전역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전함 포템킨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패하고 횡포를 일삼는 장교들에게 수병들의 불만은 고조된 상태였고, 여기에 저녁식사로 썩은 고기가 나오자 수병들은 거세게 반발을 했다. 사태를 진압하고자 장교가 항의하던 수병을 사살함으로 선상에서 반란이 시작되었다.
현실에서는 포템킨이 정부군에 의해서 제압되지만 영화에서는 왜곡된 결말로 인민들의 동참을 선동한다. 총 다섯 장으로 구성하고 있는데, ‘1장 인간과 구더기’, ‘2장 바다에서의 드라마’, ‘3장 죽은 자가 정의를 이끈다’, ‘4장 오데사의 계단’, ‘5장 함대와의 조우’가 그것이다. 이중 단연 압권으로 뽑히는 장면은 ‘오데사의 계단’인데 이 영화가 영화사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쓰인 ‘몽타주’에 있다.
몽타주는 ‘조립하는 것’을 일컫는 프랑스어이다. 원래는 연극을 비롯한 시에도 사용되던 이 용어는 ‘전함 포템킨’만이 가진 특징은 아니었다. 숏과 숏을 결합시켜 의미를 만들어내는 기법은 당시 대표적인 러시아 감독 베르토프나 쿨레쇼프 등의 작품에도 활용되는 것이었다. 다만, ‘전함 포템킨’은 앞선 몽타주와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마치 벽돌을 쌓듯이 연결되고 연쇄적인 이미지를 추구하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이 영화의 감독 에이젠슈타인은 두 숏이 충돌하여 하나의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는 ‘변증법적 몽타주’를 추구했다. 그는 쿨레쇼프의 이론을 계승하되 운율, 리듬, 음조, 배음, 지적 몽타주로 개념을 확장시키고 ‘전함 포템킨’에서 이를 증명해 보였다.
‘오데사의 계단’에서 포템킨 전함을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은 양산을 든 귀부인부터, 어린아이, 노인, 심지어 다리가 없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모두 기쁜 표정을 지으며 저마다의 제스쳐를 취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포템킨 전함에 있는 수병들의 화답과 번갈아가며 지속되는데, 쇼트의 길이가 확보되어 있어 비교적 여유로운 느낌을 주며 혁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갈증을 채워주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코사르 군대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잔악한 학살을 행할 때, 특히 그 강도가 강해질수록 쇼트의 길이는 짧아진다. 편집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긴장과 공포를 더하는 것이다. 이를 운율 몽타주라고 한다.
코사르 군대의 직선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데 비해, 아비규환으로 흩어지는 군중들은 혼란스러움과 공포를 가중시킨다. 여기서 리듬몽타주가 발생하는데, 영화 속의 리듬에 변화를 주어 전하고 싶은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첨언하자면, 도망가는 군중들도 이를 쫓는 군인들도 계단 아래로 하강하는 이미지인데 비해, 아이를 잃은 여인은 오히려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전환은 방향의 충돌과 대비를 불러와 어머니의 슬픔과 절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음조몽타주의 경우 어둠과 밝음, 평면과 입체의 충돌로 명암, 농담, 소리, 구성, 색조 등을 이용해 감정 등을 파생한다. 군대의 그림자가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여인을 뒤덮을 때 느껴지는 공포가 그러하다. 배음의 몽타주는 쇼트에 이용되는 요소들이 다양한 부차적인 요소와 어울리면서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이는 아이를 안고 군인들에게 항의하는 여인에게서 잘 나타나 있는데, 결의에 찬 여인의 모습이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그 위로 드리우는 군인들의 그림자가 부차적인 요소로 작용하면서 극적효과를 더한다.
마지막으로 지적 몽타주의 경우에는 전혀 관련 없는 이미지를 충돌시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왜?’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고 이는 의미를 확장시킨다. 이를테면 오데사의 계단에서 학살이 있은 후, 뒤늦게 포템킨이 코사르 군대의 근거지인 극장에 발포하게 되는데, 중간 중간에 잠자고 있던 사자 석상이 한 장면을 걸쳐 일어나 포효하는 것을 몽타주로 보여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 쇼트의 연결은 관객들에게 의문을 던져주며 해석할 여지를 준다. 이는 “돌사자마저 분노해서 일어난 것인가?” 라는 등의 유추를 가능하게 만들며 감독의 의도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전함 포템킨’은 이러한 충돌 몽타주를 영화역사상 처음으로 도입한 영화였으며 영화기법에 혁신적인 선구자 역할을 했다. 또한 세계 평론가들에 의해 위대한 영화로 손꼽히는 고전 명작이며, 선전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어 무성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미학의 끝을 보여주었다는 평도 심심찮다. 이는 앞서 언급한 ‘몽타주’라는 편집 기법이 지니고 있는 힘 때문이기도 하고, 전문배우가 아닌 실제 수병과 오뎃사 시민들을 사용해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촬영을 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오뎃사의 계단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최근까지도 오마주 되고 패러디 되고 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언터쳐블>(1987)에서 오뎃사의 계단은 장소와 편집 기법만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다. 그 외에도 <여인의 음모>(1985), <바나나 공화국>(1971), <우리는 그토록 사랑했네>(1974) 최근 <케밥 커넥션>에 이르기까지 많은 감독들이 경의를 표하며 오마주하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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