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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아니스트 / 미하일 하네케
    뭔가 리뷰 2018. 11. 7. 01:46



    인정한다. 보면서 울었고 보고나서 한 동안 몸 속에 진동이라도 이는 것 같았다. 최근에 몇 편의 영화를 봤는데 그 중에서 가장 와닿은 영화였다. (마음에 들었다기 보다는 그냥 불쑥 튀어 들어왔다고 해야할까.)


    에리카는 저명한, 그리고 유능한 피아니스트이자 피아노 교수이다. 그녀는 노모와 살고 있으며 그녀의 이름과 능력이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녀의 마스크 때문인지, 아니면 연출된 디테일 때문인지 그녀는 어딘가 어설프다. 슈베르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학생들의 연주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외에는 그녀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보기 드물다. 


    노모는 그녀가 교수가 되고 결혼할 나이가 넘었음에도 통금 시간을 정하고, 그녀의 모든 일에 간섭하려 든다. 단적인 예로 도입부부터 6500프랑에 산 원피스를 가지고 왜 돈 낭비를 하냐고 따져드는 노모의 모습이 그렇다. 그녀는 노모에게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물으며 울고, 노모도 나에게 왜 그러는 거냐면서 울먹인다. 


    개인적으로 좋은 영화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중심을 잡는다고 생각한다. 첫 장면에서 이미 그녀와 노모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어설픈 존재들은 그녀와 그녀의 노모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노모는 자신의 삶을 찾지 못하고 딸에게 집착한다. 딸만 바라보며 살고 있다. 에리카는 학교에서 교수로서 완벽히 역할을 하지만 (어쩌면 과도할 정도로) 집에서는 여전히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는 소녀같다. 에리카의 저명한 교수라는 정체성은 그녀의 것이라기 보다는 그녀의 어머니가 만들어낸 모델에 가깝다. 


    그런 모녀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에리카의 행동들은 여기서 기인한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며 어떻게 해소해야 할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호하다. 처음에 그녀가 어떤 사람으로 존재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미성숙한 소녀와 지적이고 권위 있는 교수 사이의 어딘가에 갇혀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오랫동안 살았다. 이미 어느정도 왜곡된 자아가 그녀에게 자리잡고 있다. 


    그녀의 주변에 관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존경을 표한다. 예의와 격식을 차리고 어려워한다. 그녀는 아주 능숙하게 교수로서 역할을 하지만 그 내면은 언제나 불안하기만 하다. 후에 월터에게 자신이 얼마나 힘 없는 존재인지 알려달라면서 구속과 폭력을 원하는 것은 그 불안이 만들어낸 욕구이다. 자신은 존경을 받을 만큼 자라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그녀는 그런 자리를 지속하고 있고 그 속에 숨어있는 미성숙한 소녀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단지 노모가 원하기 때문에, 오래된 관성에 몸을 내맡길 뿐. 


    말하자면 그녀는 껍질을 벗고 싶고, 모든 걸 내려놓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노모조차도 그런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녀는 분명 사랑 받고 싶고, 편하게 있고 싶으나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떠나온 것처럼 느낀다. 그런 그녀에게 월터는 가능성이다. 무력하고 철없고 사리분별 못하는 소녀인 그녀를 드러내고 그대로 품에 안길 만한 가능성이다. 


    적어도 그녀의 레슨을 받는 동안, 그녀에게 밖에 나가서 놀자고 한 사람은 그 밖에 없었으며, 그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역시 월터 뿐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안겨도 될지, 드러내도 될지, 맨살을 보여도 될지 혼란스러워한다. 드러냈다가 거절당할까 두렵다. 그래서 그녀는 돌다리라도 두드리듯 그를 밀어내려 한다. 차갑게 대하며 상처받을 말만 골라서 한다. 그래도 월터는 자신의 안정성을 어느정도 보장한다. 그녀가 어떻게 행동하든 변치않는 호감을 표한다. 


    그녀에게는 월터에 대해 이중적인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드러낸 자신을 안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허울없이 함부로 대해줬으면 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을 떠나지 않도록 자신의 통제권 내에 두려고 하는 마음이다. 그녀를 어쩌면 마조히스트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마조히스트는 단지 피학적인 고통을 통해 쾌락을 얻는 변태 따위가 아니다. 


    대체로 마조히즘은 오랫동안 중압감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나, 자신이 원치 않은 역할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때문에 가학하는 대상이 나타나게 되면 모든 중압감과 역할을 그에게로 돌리고 해방되려 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모욕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신을 믿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삶의 주인을 모심으로써 자기 삶이 주는 중압감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다만, 그게 보다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것 뿐이다. 보이지 않는 신이 있다고 믿는 것 보다는, 온 몸으로 겪는 것이 더 직접적이고 위안이 될테니 말이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나체상태로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흥분은?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서 '했더라'식으로 밖에 말할 수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오르가즘이라는 것은 '절정' 상태라기 보다는 '이완' 상태가 더 적절하다는 의견이 있다. 쾌는 결국 불쾌를 제거한 상태이고, 사람은 일상 생활에서 항상 불쾌를 지고 살아간다. 무언가에 집중하거나 선택하거나 스트레스 받는 환경에 처하거나,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출근할 준비를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불쾌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루 대부분을 긴장, 어쩌면 불쾌속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도 있다. 긴장과 이완, 쾌와 불쾌는 일종의 명암과 유사해서 하나가 있기에 다른 하나가 있을 수 있는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 즉, 오르가즘은 모든 긴장에서 해방된 상태다. 마조히스트 역시 긴장에서 해방되기 위해 주권을 타인에게 양도한 것으로 그것이 육체의 쾌감과 관련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에리카는 월터에게서 일종의 해방을 원한 것이다. 여기서의 해방은 여러 단어로 치환 될 수 있다. 이해가 될 수도 있고 사랑이 될 수도 있고, 믿음이라던가 안전지대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메시지가 온전히 전달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월터는 에리카를 모르며, 교수인 에리카만 알고 있다. 미성숙한 에리카는 알 수도 없고, 알게 된다고 해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월터에게 에리카는 월터의 에리카이며, 에리카에게 월터는 에리카의 월터니까 말이다. 서로는 자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대상으로 인식했고 이는 결국 극으로 치닫게 된다. 


    에리카가 노모를 덮치려 했을 때 나는 울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가 이해됐다. 과하게 몰입해서 그녀가 된 것처럼 애처로웠다. 그때 에리카는 모든 것을 내던졌다. 어머니에게만큼은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 한 번 자기 자신을 열어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노모는 이해하지 못했고 에리카는 울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원하는 것도 모르고 그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니, 칼을 쥐어도 찌를 수가 없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 지 조차 모르니까. 모두가 피아노 공연을 보기 위해 홀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홀로남겨졌다. 모두가 교수인, 정상적이고 권위 있으며 지적인 그녀를 보러갔을 때, 미성숙한 에리카는 자기 자신을 찔렀다. 죽으려 했거나 죽어갔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아무르>를 봤을 때도 그렇지만, 하네케 감독의 영화를 보면 '사랑'에 대해 재조명하게 된다. 도대체 '사랑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런 말이 애초에 존재하긴 하는가. 그냥 원하는 것을 바란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이 아닐까. 우리는 둘만 할 수 있는 특수한 계약을 했고 이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서약문 같은 것이 '사랑하다'라는 말이 아닐까. 


    누군가는 이를 매우 비관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랑은 사랑인데 그것을 왜 그렇게 삐딱하게 보냐는 것이다. 그 말도 맞다. 하지만 살다보면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하게 되는 날이 있다. 나이가 몇이든 남자든 여자든 한 번 쯤은. 


    <피아니스트>를 보자. 그리고 한 번쯤은 생각해 보자. 사랑이란 말에는 얼마나 많은 스크립트가 들어있는지. 무엇을 원한다는 명령과 설정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생각해 볼 만하다. 




    p.s 그리고 나는 하네케 할아버지에 대해서 집착적으로 검색을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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